눈으로 보는 소리
/ 김선화
땅만 보고 걷는 버릇이 있다. 길을 걸으면서 보도블록의 수를 세기도 하고, 몇 칸씩 건너 뛰어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주 오던 사람의 가슴팍에 안길 뻔한 일도 있다. 그런 경우 무안한 마음에 시침이라도 뗄 일이나, 무심코 상대방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가 눈이 마주쳐 가슴이 후끈해지기도 하였다. 지나치고 나서 부딪치려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려 해도 되살아나는 일이 없지만, 가슴에 와 박힌 그 눈빛에 공연히 마음이 흔들리곤 하였다.
서울근교라고는 하지만 시내에 나가려면 차를 몇 번씩 갈아타야 하는 나는, 여기 의왕에서 사당까지 버스를 이용한다. 의왕의 모락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면 이내 인덕원에 가 닿고,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길이 한적하여 소풍 길과 다를 게 없다.
몇 해 전에는 그 길에서 눈빛이 아주 맑은 사람을 만났다. 차안에서 흔히 있는 일로, 그 날도 말쑥한 차림의 한 사람이 버스에 오르더니 무언가가 적힌 인쇄물을 돌리기 시작했다.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사람들에게 몇 차례 손수건을 샀던 나는 또 그런가보다 하였다. 한데 막상 손에 전해진 종이에는 시(詩) 두 편이 적혀 있었다. 작자가 본인이라는 것 외에는 이름을 써넣지도 않았고, 내세워질 법한 약력 하나쯤도 들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명시인(無名詩人)의 시 구절 중에는 이따금씩 되살아나게 하는 대목이 있다.
'눈으로 소리 듣고/ 가슴으로 시를 쓴다'는 그는, '물가에 벗어놓은 신발 두 짝에/ 가족들의 모습이 어리었다'고 표현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극단적인 행동을 하려 했음을 읽게 하는 대목이었다. 나는 그때 그가 말하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청각장애인이었다. 청각장애인이라는 말 대신에 '눈으로 소리를 듣는다.'라고 한 것이다. 다행히 눈으로 들은 소리를 글로 표현할 수가 있어서 그의 눈빛은 여과된 물처럼 비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시를 돌린다고 해봐야 얼마만큼 공감을 얻어 동정을 살지는 의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 시 구절과 마주치기를 바라지만, 몇이나 마주칠지는 미지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눈이 맞지 않고서는 마음이 동(動)할 수 없다. 또 가슴에 품은 뜻이 제아무리 크다 해도, 누군가와 눈을 맞추지 않고 혼자서는 일을 해낼 수가 없다. 남녀간의 정분도 눈이 맞아 일어난 사건이요, 옛 선비들이 사랑에 모여 나랏일을 도모하던 것도 눈이 맞은 데서 비롯된 일이었다.
눈 맞춤 중에도 가장 성스러운 것은 엄마와 아이가 눈 맞춤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존재하므로 그 어느 것도 개입하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나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대화에 '눈 맞았다'는 말만 나오면 귀가 쫑긋해지곤 하였다. 애들이 들으면 안 된다고 하였지만, 그 '눈 맞았다'는 말은 왜 그리도 귀에 와 박혔는지 모른다.
생각하기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누군가와 눈을 맞춘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데서 힘을 받고, 또 내가 남을 향해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무형(無形)의 자산이다. 이처럼 눈으로 주고받는 사람들 간의 감정에는 은유가 배어있기도 하다.
50여 년 전이지만 내 부모님은 감정이 먼저이고 중매가 나중인 결혼을 하셨다. 어머니는 6·25때에 피난중인 아버지를 처음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 나이 열 네 살이었는데, 먼발치서 아버지를 본 어머니는 얼른 이루어지지 않는 혼인에 마음을 앓아, 드러눕기에 이르렀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던지 외가에 중매쟁이들이 줄을 잇는 시기에 맞춰 아버지 쪽에서도 매파를 놓았다. 그렇게 하여 좀처럼 휘기 어려운 황해도혈통과 비교적 성격이 유한 충청도 혈통의 두 가계가 사돈으로 맺어지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두 분 사이에 오고간 말 한마디 없이, 그분들을 부부의 연(緣)으로까지 이끈 힘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머니는 아버지의 묵묵함에 반하셨다고 하는데…. 아무튼 두 분이 서로 한 울타리 안에 들게 된 것은 그 눈빛 탓이다. 그 옛날 두 분은 이미, 서로의 가슴속에 울려 퍼지는 소리를 눈으로 감지하셨던 게 틀림없다.
"내가 한 3년 지켜봤다가 크기를 기다려 색시 삼았지."
하시는 아버지 곁에서 웃고 계신 어머니는 지금도 꼭 열네 살 적의 소녀모습이다. 달밤의 박꽃같이 안면 가득 수줍음이 번진다.
오늘도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을 맞추며 오고 간다. 그 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이뤄내고 있을까. 나는 시를 들고 다니던 그 걸인의 눈빛에 마음이 머문다. 그러면서 눈으로 보는 소리에 움트는 크고 작은 일들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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